좋은 미끼 상술이 다 그렇듯, 미끼는 금세 사라졌고 바꿔치기는 눈에 띄기에는 너무 느렸다. EU 관료 조직은 시간을 들여 거부권을 깎아 왔다.
EU의 이번 대러시아 제재를 둘러싼 긴 싸움은 주권의 마지막 저항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유럽연합의 스물한 번째 대러시아 제재는 7월 23일에 통과됐다. 통과를 일주일 넘게 붙잡고 있던 나라는 헝가리가 아니라 그리스였고, 그리스가 지킨 것은 자국 선주 한 사람의 배였다.
그리스가 거부권을 풀면서 EU가 21차 제재에 합의했다 (키이우 인디펜던트, 2026-07-23)제재안에는 러시아산 LNG를 제3국으로 실어 나르는 것을 막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리스는 침공 이전에 서명된 운송 계약은 계속 허용하고, 해마다 다시 들여다보되 새 계약은 맺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 낸 뒤에야 거부권을 풀었다.
문제가 된 배는 얼음을 깨며 다니는 LNG 운반선이다. 북극 야말 가스전에서 나오는 LNG는 겨울에 얼어붙는 항로를 지나야 해서 아무 배나 실어 나르지 못한다. 그 항로를 도는 선단을 그리스 선주 조지 프로코피우가 갖고 있다. 배 몇 척이 27개국의 결정을 멈춰 세웠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그리스 해운의 크기를 보면 된다.
바다에서 제재가 실제로 집행되려면 배의 주인이 EU 안에 있어야 한다. 그 주인들이 한 나라에 몰려 있으면, 해운을 건드리는 조항은 27개국의 외교 문제가 아니라 한 나라의 국내 산업 문제로 바뀐다.
그리스선주협회(UGS) 연례보고 · 2026-05-26 공개

제재가 통과되고 나흘 뒤, 파이낸셜타임스는 브뤼셀이 제재를 처리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짜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스의 거부권이 선주의 선단을 지키자 EU가 대러 제재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비즈니스업턴, 2026-07-27)검토되는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제재를 커다란 묶음 하나로 내놓지 않고 주제별 작은 묶음으로 나눠 따로따로 처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부 외교정책 결정을 만장일치가 아니라 가중다수결로 넘기는 것이다. 둘 다 겉으로는 승인 속도를 높이려는 절차 조정으로 읽힌다. 실제 효과는 회원국이 협상 자리에서 거부권을 꺼낼 기회를 줄이는 쪽에 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야 이야기가 이어진다. 거부권은 조약이 회원국에 준 권한이라 없애려면 조약을 고쳐야 하고, 조약을 고치려면 다시 만장일치가 필요하다. 안건을 잘게 쪼개는 방식은 권한을 그대로 둔 채 그 권한을 쓸 자리만 줄인다.
EU 이사회, 러시아 가스 수입을 단계적으로 끊는 규정을 최종 승인
21차 제재 채택, 그리스가 예외를 받고 거부권 철회
파이낸셜타임스, 브뤼셀이 제재를 주제별로 쪼개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
EU 가스 저장 목표 시한
러시아산 LNG 수입 전면 금지 발효
러시아 가스를 끊어 가는 일정과 겨울을 넘길 가스를 채워야 하는 일정이 같은 몇 달 안에 겹쳐 있다.
EU 이사회 보도자료 · 파이낸셜타임스 · 2026-08-05 조회
7월 29일 기준 유럽연합의 평균 가스 저장률은 55.7%였다. 러시아산 LNG를 완전히 끊는 날짜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전에 창고를 채워야 하는 날짜도 정해져 있다.
이번 예외가 한 번의 타협인지, 거부권이 조용히 얇아지는 과정의 한 장면인지는 다음 패키지의 모양에서 갈린다. 22차가 다시 하나의 큰 묶음으로 만장일치를 거쳐 나오면 거부권은 아직 협상 카드로 살아 있다. 반대로 제재가 주제별 작은 묶음으로 쪼개져 개별 처리되거나 외교정책 결정의 가중다수결 전환이 이사회의 공식 의제에 오르면, 이번 그리스 건은 거부권이 통째로 쓰인 마지막 사례로 남는다. 유럽이 러시아 가스를 끊는 일정과 유럽이 겨울을 나야 하는 일정은 같은 달력 위에 있다. 그 달력을 회원국 한 곳이 반대하면 멈추는 방식으로 굴릴 수 있는지가 이번 제재에서 시험됐다.
2026-08-05 조회 · 그리스 선단 비중은 그리스선주협회 2026년 연례보고 기준, 가스 저장률은 2026-07-29 시점 EU 평균이다.